기타 ‘의약품 접근’은 생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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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해외시각]‘의약품 접근’은 생사 문제
[속보, 세계] 2003년 01월 13일 (월) 18:27
〈파스칼 라미/EU통상담당 집행위원〉
많은 개도국 시민들에게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핵심 의약품의 접근을 보장하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다. 하지만 그런 의약품이 특허권의 보호를 받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의약품 접근 문제는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다자주의적 체제의 문제해결 능력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협상은 지난해 말부터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이후 각국은 유럽연합(EU) 주도로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개도국들은 수백만명의 생명을 일상적으로 위협하는 에이즈나 결핵,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 치료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을 증진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에이즈 하나만 해도 매년 3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하지만 좋은 약은 대개 특허권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값이 매우 비싸다. 이 때문에 개도국의 의약품 접근을 보장하기 위해 지적재산권에 관한 WTO 협정의 개정 논의가 그동안 진행돼 왔다.
각국은 2001년 말 카타르 도하에서 에이즈를 비롯한 전염병으로 인한 개도국 보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선언에 합의했다. 그 선언은 WTO 회원국들이 이같은 질병을 퇴치하는 데 있어 (특허권자의 허락없이) ‘강제 사용권’을 부여할 수 있게 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의약품 제조 능력이 없는 나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는 지난해 말까지 해법을 찾도록 예정돼 있었다. 또 어떤 질병을 대상으로 하고 어떤 나라들을 대상으로 할 것인가.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국제사회의 이같은 노력이 신약 연구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EU나 대다수 나라들이 볼 때 제약사들의 우려는 전혀 근거가 없진 않지만 과장된 것이다. 그리고 만약 가난한 나라들이 애당초 약을 구입할 능력이 없다면 다국적 기업들은 어디서 그들의 상업적 이익을 잃는단 말인가. 도대체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가 되나.
지난해 12월20일 국제사회는 합의에 거의 도달했으나 미국 대표만이 여기에 포함되는 질병의 종류를 놓고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나는 WTO가 적어도 20여개 ‘주요 질병’에 대해 합의에 도달할 것으로 확신한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주요 질병 외에 ‘또다른 질병’으로 인한 개도국의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이다. 이런 전염병 위기에 직면한 개도국이 의약품에 접근할 때에는 분쟁처리절차 회부를 자발적으로 유예해주자는 논의가 지금까지 수없이 진행돼 왔다.
개도국들은 그럴 경우 WTO 차원의 보복에 직면하지 않으리란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적어도 EU는 지난해 12월 타결안을 수행하는 어떤 개도국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법적 확실성을 부여하려면 다자적이고 구속력 있는 해법이 여전히 필요하다.
어렴풋하나마 하나의 해법이 보인다. ‘또다른 질병’으로 인한 공중보건 문제가 발생할 때 세계보건기구(WHO)에 자문을 요청하는 방안이다. WHO는 개도국의 공중보건 문제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상황을 평가하고 조언할 만한 자격이 있다. 이 방안은 명시적인 질병 목록 없이도 (WTO안이) 가능한 가장 넓은 범위의 주된 질병들을 포괄하고 있음을 확신시켜 줄 것이다.
무역정책이 세계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이번 의약품 접근 논쟁을 능가하는 사례는 없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 논쟁을 매력적인 연구주제로 여기겠지만 각국 무역 장관들은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신속하게 교착상태를 벗어나 협상을 마무리짓지 못한다면 역사가들은 결코 우리를 호의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WTO의 의견에 대한 동의가 전염병 정복을 보장하는 ‘마술 탄환’은 아니며, 모든 나라에 적절한 의약품 접근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구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국제기구가 일관되고 상대적으로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정리/문영두기자 ydmo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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