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 [경향신문] “이 광고를 보고 콘돔을 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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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고를 보고 콘돔을 사겠습니까”
[경향신문 2004-10-13 20:00]
지난1일부터 MBC를 통해 하루 두 차례 방영되는 콘돔광고. 질병관리본부와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이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콘돔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작한 공익광고다. 국내 지상파 방송에 처음 등장하는 콘돔광고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눈과 귀가 집중됐다.
광고는 첩보작전을 하듯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녀가 한적한 공원에서 은밀한 접선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쪽에서 “생년월일은?”하고 물으면 다른 한 명이 “1981년 6월5일”이라고 답하는 식이다. 광고는 두어 차례 더 “현재 규모는?” “전 세계 감염인 4천만명” “한국은?” “매일 1.7명씩 발생” 이라며 문답을 계속한다. “그렇다면 대책은?” 아무 말 없이 남자가 꺼내놓은 것은 아기자기한 콘돔캐릭터와 에이즈 퇴치를 상징하는 빨간 리본이 그려진 콘돔상자. 그리고 들려오는 나지막한 내레이션. ‘우리나라도 더 이상 에이즈의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질병관리본부는 “에이즈와 콘돔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시청자들이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작했다”고 밝혔다.
과연 질병관리본부의 말마따나 시청자들이 이번 광고를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 광고를 통해 콘돔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고 콘돔 구매 시 거부감을 없애는 데 일조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007을 연상시키며 흥미를 유발하려 했던 시도는 눈여겨 볼만하다. 그러나 그 뿐이다. 에이즈 예방을 위해 사용을 권장하는 광고에서조차 콘돔은 은밀히 주고받아야 할 낯 뜨거운 물건이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후 인적이 드문 공원 벤치에서나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물건이다.
게다가 광고는 처음 발견된 시점이나 전 세계 감염인 수, 발생률 등 에이즈와 관련한 사전적 내용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한다. 그러다보니 정작 ‘우리나라도 더 이상 에이즈의 안전지대가 아닙니다’는 메시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교과서에서 봤음직한 내용으로 광고 집행시간 40초가 한없이 무료하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광고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선생님처럼 ‘이러이러 하니 콘돔을 써라’라는 식의 화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반감을 갖게 한다. 에이즈를 ‘강 건너 불
보듯 하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콘돔을 쓰라는 말은 ‘메아리 없는 외침’정도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현재 집행되고 있는 광고가 주장만을 나열할 뿐,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외국의 경우 콘돔광고는 크리에이티브의 백미(白眉)로 인식되곤 한다. 금기시하는 주제이니만큼 얼마나 기발한 아이디어로 콘돔을 친숙하게(혹은 에이즈를 보다 무서운 병으로) 표현하고 함축적으로 나타내는지에 중점을 둔다. 그러니 어디서 들어봄 직한 이야기를 쏟아내기보다 강렬한 한 장면이나 핵심을 찌르는 하나의 문구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외국의 수많은 콘돔광고에 구명튜브와 구호망이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가령, 프랑스에서 방영된 에이즈 예방캠페인에는 신데렐라가 등장한다. 호박 마차 안에서 왕자님과 사랑을 나누던 신데렐라가 내뱉는 한마디. “왕자님, 이거(콘돔)를 끼우세요.” 그리고 이어지는 카피가 바로 “그래서 당신의 로맨스는 아름다운 동화로 남게 됩니다.” 누군가 콘돔을 비정상적인 성행위 도구쯤으로 인식했다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 발칙하지만 친숙한 소재를 이용해 콘돔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조그만 변화의 틈을 마련한 것이다.
현재 집행되고 있는 콘돔광고를 본 한 네티즌은 “정보는 좋았지만 와 닿지 않는 내용”이라고 꼬집으며 “2,30대 친구들끼리 콘돔을 서로 선물하는 모습을 영상에 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개선점을 제안하기도 했다.
동국대 광고학과 조형오 교수 또한 “콘돔으로 에이즈를 예방한다는 광고 메시지는 확실하지만 설득력 있는 메시지 전달은 아니다”면서 “에이즈와 콘돔에 대한 공중의 인식단계를 사전에 조사했는지 의문”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제 막 첫발을 내딛은 국내 콘돔광고. 상업광고 금지품목이며 사회적으로도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 벽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콘돔광고이던, 우유광고이던 간에 소비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메시지 전달도 가능하다는 게 광고계의 불문율. 어찌됐든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구절처럼 국내 첫 지상파 콘돔광고라는 데 위안을 삼아야 하는 것일까.
<이성희기자 mong2@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