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4일 세계일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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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동성애자=에이즈 선입견 버려주세요"
지난 1일 '에이즈의 날'계기로 들어본 동성애자 김현구씨의 ‘이유있는 항변’
동성결혼을 막는 규정은 위헌이라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대법원의 지난달 판결을 계기로 다른 주에서도 동성 결혼을 합법화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네덜란드 벨기에 캐나다가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가운데, 지구촌 각국에서도 동성간 결혼을 허용하는 추세다. 그러나 싸늘한 사회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우리나라 동성애자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동성애자를 상대로 활발한 에이즈 예방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현구씨를 통해 우리사회 속 동성애자의 삶을 조명해본다./편집자주
제 오른쪽 귀고리 보셨군요?
그래요. 저 김현구, 동성애자입니다.
우리들 말로는 이반이라고 하죠. 우리는 이성애자를 일반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는 ‘다를 이(異)’를 붙여 이반이라고 불러요.
저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입니다. 여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여자가 돼야 한다는 것은, 사랑은 남자와 여자만 할 수 있다는 편견에서 나온 거예요.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맞지 않는 트랜스젠더와는 또 다르죠.
지난 1일은 저한테 꽤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유엔이 정한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고, 저는 한국에이즈퇴치연맹에서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에이즈 예방홍보사업(iSHAP)을 하고 있거든요. 성적소수자를 다룬 퀴어영화제도 그날 개막했는데, 에이즈 관련 다큐멘터리 상영에 맞춰 예방홍보활동을 벌였습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서울 종로와 이태원에 있는 게이바, 게이사우나에 콘돔과 러브젤, 팸플릿을 들고 나갑니다. 평소엔 이반단체에 교육을 나가기도 하고 이반행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에이즈 문제에는 할 얘기가 참 많아요. 그동안 사회는 동성애자를 마치 바이러스원처럼 취급하면서 인권을 유린하고 비난하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동성애자들 스스로 에이즈 문제를 터부시하면서 예방에 소홀하게 됐죠. 손님이 싫어한다며 저를 아예 못 들어가게 하는 게이바도 있고, 제 활동이 ‘동성애자=에이즈’를 인정하는 것 아니냐며 비난하는 이들도 있어요.
이러한 비난과 논쟁은 정작 에이즈 예방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에이즈는 동성애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도 급속도로 퍼지고 있거든요.
제가 좀 흥분했나요?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는 저에 대한 얘기를 꺼낼까 합니다.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동성애자였다고 생각해요. 성 정체성을 확실히 깨달은 건 중학교 3학년 때입니다.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더라고요.
그 땐 같은 남자에게 감정이 있는 제 자신이 굉장히 혐오스러웠어요. 막연히 ‘나도 결혼해서 잘 살 수 있겠지’ 하면서 자신을 부인했죠. 주위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있었고요. 그렇게 암울하게, 10년을 흘려보냈습니다.
1995년쯤이었던 것 같아요. 피시통신 하이텔에서 동성애자 대화방을 발견하면서 저는 비로소 세상에 나왔습니다. 저와 똑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본격적인 동성애자 모임을 시작한 거죠.
가족들이 제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입니다. 모임 소식지를 집에 뒀다가 들켰거든요. 부모님은 결국 이 사실을 모른 채 돌아가셨지만, 형은 아직도 탐탁지 않게 생각해요. 사실을 안 뒤 울고불고했던 누나는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있고요.
98년에는 매스컴에도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동성애자임을 알리는 커밍아웃을 할 땐 분명 어려움은 있어요. 가족들이 스트레스를 무척 받거든요. 형과 형수가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어요. 다니던 교회도 옮겨야 했고.
그러나 저는 더 많은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일반의 편견은 주변에서 동성애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거든요. 동성애자의 일상적인 생활을 보면 그런 편견은 가질 수 없을 겁니다. 주변의 아주 친한 사람들에게 먼저 알리면 충분히 나를 이해해 줄 거라는 생각입니다.
제 꿈은 30대 중반 보통의 남자처럼 그저 평범해요. 우선 지금 하고 있는 동성애자 에이즈 예방사업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또 조금씩 붓고 있는 청약저축으로 서울 근교에 작은 집이라도 하나 마련하고 싶습니다.
평생을 같이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아파도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몸이 건강했으면 하고요.
결혼이요? 69년생이라 사실 애가 둘은 있을 나이죠. 저도 평생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결혼할 거예요. 그 땐 동성간 결혼을 허용해 달라고 싸울 각오도 돼 있고요.
자신이 가진 편견 때문에 말 못하고 있을 뿐이지 주위 어디에도 동성애자가 있습니다. 동성애자는 바로 친구이고 가족이고 직장동료이고 이웃이라는 사실, 기억해 주세요.
글 윤지희, 사진 이종렬기자/jhyun@segye.com
<사진>동성애자를 상대로 에이즈 예방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반’ 김현구씨가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담은 닥종이 인형을 바라보고 있다. 붉은리본은 유엔에이즈가 정한 에이즈의 세계적 상징으로, 에이즈 감염자들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한 희망과 관심을 상징한다.
( 2003/12/03 16: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