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자의 헌혈을 막겠다굽쇼?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부대표)
2003년, 수혈로 인한 HIV 감염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 신문의 한 기자는 일부 동성애자들이 파렴치하게도 에이즈 감염 여부를 알기 위해 헌혈을 하므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글을 썼다. 하지만, 필자는 수혈로 인한 HIV 감염의 원인을 동성애자의 양심의 문제로 환원시킬 수 없음을 주장했었다. 왜냐하면, 헌혈자에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만한 충분한 지식과 정보가 제공되고, 그를 실천할 만한 여건이 어느 정도라도 먼저 조성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모든 헌혈자가 양심적으로 행동하길 바라는 것이야말로 복권 당첨같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먼저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해결에 나서야 할 것은 올바른 헌혈에 대한 홍보와 혈액의 관리 시스템이다. 에이즈 감염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헌혈이 아닌 보건소에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잘 홍보되고 있는지, 헌혈을 할 당시 프라이버시 보호는 잘 되는지, 헌혈의 중요성과 위험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는지 등등이다. 지금과 같이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문진표를 작성해야 하고, 버젓이 동성애자는 헌혈하지 말라는 차별적인 문구가 상황에서 어느 누가 자신이 에이즈 혹은 성병이 있다고, 최근에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이성 혹은 동성과 성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헌혈을 거부하겠는가 말이다.
'동성애자의 헌혈'이란 표현을 언론이나 국립보건원 등에서 쉽게 쓰고 있지만 이 역시 문제가 있다. 이는 마치 성 정체성과 피의 순수성 여부가 연결되어 있는 듯 느끼게 만든다. 2003년 8월 23일자의 여러 뉴스보도를 보면 “보건당국은 잇단 수혈 감염 사고가 동성애자들의 헌혈 때문으로 밝혀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집중적인 계도와 헌혈 금지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듣기에만 그럴싸한 대책일 뿐이다. 동성애자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홍보를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지 몰라도, 특정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헌혈을 하는 행위 자체를 아예 막겠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를 완벽히 가려낼 수도 없을뿐더러,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사는 것도 아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성 정체성이 아니라 성행위다. 자신이 누구랑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콘돔을 썼는지, 체액 교환은 없없는지 등의)으로 성행위를 했는가가 명확한 사실이다. HIV 감염 경로는 물론 여러 가지지만 그 중 성관계로 통한 감염률을 생각할 볼 때, 감염 우려가 있는 성행위 후 최소 3개월안에 헌혈을 해서는 안되고 보건소로 가 HIV 검사를 받아야 함을 알리는 것이 동성애자들이 헌혈을 못하도록 막겠다는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야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 유학생에게 들은 이야기다. 일본에서는 헌혈을 하러 가면 일단 ‘에이즈 검사를 위해 헌혈을 하지는 않는가’라는 질문부터 한다고 한다. 아니라고 하면 그 다음, 아주 긴 내용의 설문지를 받게 되는데 그 설문지엔 신상명세와 자신의 성경험, 성관계의 빈도, 대상, 외국에 나간 적이 없는지 등등 기타 여러 질병에 대한 아주 세심한 질의가 담겨있다. 설문지 작성을 마치면 이번엔 작은 상담실로 가서 상담원과 1대 1 면담을 하게 된다. 그때 그 유학생이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상담원이 ‘언제 피어싱을 했냐?“라고 물어서 2주전에 한국에서 했다고 하자 병원에서 귀를 뚫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귀걸이를 하기 위해 병원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지만 그는 귀찮기도 해서 병원에서 했노라고 대충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든 문진이 끝나고 이제 헌혈을 하게 되나보다 했지만 상담원은 귀를 뚫은 지 아직 한 달이 안되니 지금은 헌혈을 할 수 없다며 나중에 다시 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약 30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고 하니 우리 나라의 헌혈 체계와 비교할 때 얼마나 그 절차가 엄격하게 고수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헌혈을 할 때 이렇게 긴 시간을 요하다보니 헌혈을 하는 장소에는 만화책, 잡지, 음료수, 케익, 과자, 인터넷 등 헌혈하는 사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이쁘게 잘 꾸며져 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어디를 가나 ’에이즈 검사를 희망하는 분은 익명으로 무료 검사를 받을 수 있는 보건소로 가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의 이런 헌혈 체계에 대해 이야기하면 헌혈 사업 관계자들은 꿈같은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인력도 부족할뿐더러 워낙 혈액이 부족한 터라 수입해서 쓰는 판에 이런 복잡하고 긴 헌혈 체계를 쓰면 가뜩이나 ‘빨리빨리’를 좋아하는 국민성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의 헌혈 횟수가 더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다. 틀린 말은 아니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 일에 자신의 시간을 그렇게 오래 낭비하고 싶은 사람은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급히 헌혈자를 보호해주면서도 엄격하게 시행되는 헌혈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여기에 보다 철저한 혈액의 검사와 관리가 이루어지고, 또한 올바른 헌혈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국민 홍보와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수혈로 인한 HIV 감염이라는 비극은 사라질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본질을 잘 파악해야 한다. 편견과 오해 속에서 별 실효도 거두지 못할 동성애자 헌혈 금지나 동성애자의 양심 운운하는 대책에 대한 미련은 버리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