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문학자의 위험한 상상
신문을 보는데 숨이 턱 막힌다. 대학 교수가 유명 일간지에 쓴 컬럼이 너무도 기가 막혀서 한숨을 내쉬어야 할지 아님 그냥 허허거리며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한 무지의 극치를 달리는 발언이야 한 두 번 겪는 일도 아니긴 하지만, 인문학적 가설일 뿐이라며 적당히 연막탄까지 피워올린 뒤 천역덕스럽게 말도 안되는 논리를 펼치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다.
거창한 기념식까지 치루었던 ‘제 16회 에이즈의 날’의 바로 그 다음 날, 12월 2일자 문화일보의 <방하차서 건강이야기>란 코너에 ‘도둑의 개는 도둑을 보고도 짖지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영남대 배영순 교수의 글이 실렸다. 배 교수는 21세기 의학의 최대 화두는 ‘면역 체계’라며 에이즈나 사스 등 완치되지 않는 질병이 횡행하는 현실을 걱정하며 이 모두가 인간의 면역체계가 약해진 때문인데 그 이유가 정신적 방어 체계가 건강하지 않아서라고 추정했다. 그리곤 도둑의 개가 자기 집에 도둑이 들어도 짖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이 시비선약에 대한 판단 원칙을 잃으면 몸의 면역 체계도 잃을지도 모른단다. 가장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가령 '에이즈 환자'들은 주로 동성연애자들로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이점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성연애자들의 경우. 남자인 여자, 여자인 남자 등 자기 정체성이 교란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데, 여기서 자기교란은 시작된 것이고 이러한 자기교란에서 면역체계가 약화된 된 것으로 볼 수는 없을까? 이러한 자기 정체성의 교란, 달리는 도덕적 마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면역체계의 교란과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에이즈'라는 균은 아주 약한 것이지만 적과 동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런 병든 면역체계를 가진 사람들, 그런 동성연애자들에게서만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보더라도 자기 교란과 면역 결핍증과의 상관성이란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배교수가 자신은 의학이나 생물학에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고 미리 밝혀놓기는 했지만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인문학자의 발언이라고 해도 이것은 경악스럽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하다. 대체 저 짧은 몇 줄의 글 안에 얼마나 많은 무지와 편견과 차별과 그릇된 선동이 포함되어 있는가.
동성애를 정체성의 교란 현상으로 보는 건 이성애중심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정체성의 교란을 도덕적 마비로 연결시키고 그 때문에 면역 체계가 약화되어 에이즈에 걸린다는 식의 발언은 모든 HIV 감염인들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어떻게 도덕성이 질병의 감염을 결정짓는단 말인가. 도둑의 개가 자기 주인이 도둑이라는 이유로 도둑을 봐도 짖지않는다는 식의 비유도 결코 여기에 해당할 수가 없다. 이런 식의 발상은 병의 원인과 책임을 당사자의 행실에서 찾음으로써 모든 것을 운명론으로 귀결시켜 치료와 보호의 의미를 희석시켜 버린다. 희귀병 환자들이 토로하는 바, 정작 자신의 병보다 ‘업보나 운명 때문에 이상한 병에 걸렸다’는 식의 주위의 편견 때문에 더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신종 바이러스나 괴질로부터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인간 자신의 면역체계 밖에 없다고 태연히 말을 하지만, 인간의 면역 체계가 약화되는 데에는 타고난 유전적 기질부터 환경 오염, 식습관, 스트레스 등 다양하고 복잡한 원인이 따른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면역 체계가 아니다. 강한 면역체계를 가지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사고방식은 약육강식의 옹호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에 함께 바이러스의 역사도 변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될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 희망은 고난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이지 않겠는가. 인류를 위협하는 그 어떤 난해한 질병 앞에서도 포기하지않고 생명을 구해 낼 길을 찾는 것. 정말 위험한 자기 교란은 자신의 무지와 편견도 인식하지 못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할 줄도 모르며, 다양성의 존중이 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에이즈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에이즈에 대해 정확하게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어찌 정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부대표)